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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경의 역사 Best
    183.☆.165. 183
    작성자 : 포구젓갈
    작성일자 : 2014-08-20 09:54:27

    강경은 17세기 초에 잡초 무성한 황망한 습지로 갈대와 달풀이 우거지고 여러 가지 동물들만이 서식하던 곳이었으나, 김 씨 부부가 옥녀봉 부근의 금강 연변에 최초로 이주하여 주거지로 정착되었다고 구전되고 있을 뿐 강경의 지명유래에 대한 문헌상의 기록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조선 영조 3년(1757년)에 간행된 여지도서(與地圖書)의 은진현(恩津縣) 지도에 "강경포(江景浦)"라는 지명이 뚜렷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대동여지도(大東與地圖)에 보면 현재의 위치에 "강경(江景)"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 박지원이 쓴 "허생전(許生傳)"에도 강경포구가 등장한다.

    허생원은 한양의 어느 부호에게 1만 냥을 빌어 서해의 무인도에서 도둑들과 생활하면서 5년 만에 1백만 냥이나 벌어 들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은 그가 강경에서 소금을 팔아 돈을 벌어 들였으며, 상행위를 통해 우리나라의 원시적인 자연경제를 타파해야 된다고 주장한 것은 우리나라 경제사에서도 큰 의의를 갖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조선시대의 강경 포구는 옛날의 허생원처럼 소금장수로 들끓었던 곳이고, 고깃배로 성황을 이루었던 곳이다.

    더우기 당신의 원시 경제유통상 소금이야말로 금처럼 중요한 교환수단이었고, 이 귀중한 소금의 집산지로 강경포구가 발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지리적인 특징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조선 3대 시장으로 이름난 강경포구는 조기, 소금, 새우젓 등 3대 산물로 전국에 명성을 떨쳤다.

    강경은 그 옛날 번성했던 공주, 부여가 강줄기를 조금만 따라 올라가면 되고 훤하게 트인 평야로는 전주, 여산 등 전라도 지방으로 통하기에 아주 편리했으며 부여, 공주를 통해 청주, 한양 등지로 빠질 수 있었고 또 밖으로 조금만 가면 서해바다, 인천, 부산은 물론 중국, 일본 등지와도 교역하기가 좋았다.

    그러니 강경 포구에 자연히 발달한 것은 상업이며 그 명성은 너무도 유명하여 대구, 개성, 강경 이 세곳을 옛부터 조선 3대 시장이라 했다.

    또한 강경상업고등학교가 전국에서 손꼽히는 명문학교로 성장한 것도 역시 이와 같은 역사적인 배경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리적 여건은 역사의 수난이 있을 때마다 심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

    왜구의 침략에서부터 당나라의 군사가 백제를 칠 때도 강경포구를 거슬러 갔는데, 강경 포구야말로 백제왕조의 수문장이었고, 대소의 어선과 무역선의 요람이었다. 더욱이 포구 바로 뒤에 우뚝 솟아 강경의 상징이 되어 주고 포구의 거센 바람을 막아주는 옥녀봉(玉女峰) 위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노라면 확 트인 강경들과 하얀 비단 폭을 깔아 놓은 것처럼 반짝이는 금강의 풍치가 아주 아름답다.
    옥녀봉은 모두가 암석으로 되어 있는데도 그 봉우리에 늙은 고목이 싱싱한 잎을 피우고 있으며, 옛날 백제의 왕족들이 이곳에서 놀면서 풍류를 즐겼고, 여기에서 강경에 출입하는 배의 안전과 풍어를 비는 제사가 북을 치며 용신(龍神)을 향해 베풀어 졌고, 조선시대에는 여기에서 군호(軍號)를 올렸다. 해발 80m밖에 안되지만 높은 산이 없는 평원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멀리 미륵산, 노성산, 황하산, 계룡산 등 각 진지와 봉화를 올려 서로 신호를 보내기엔 아주 좋은 장소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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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경.JPG (1.54 MB), Down :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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